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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H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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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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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는 작은 기차 안에서.

1월 7일.

   어제는 나폴리 지하투어를 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텁텁했지만 동시에 시원한 기분도 들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수로를 판 곳이랬다. 수압을 활용해서 물을 이동시켜 나폴리 전체의 식수를 조달했다. 

그리고 1885년경까지 그건 계속되었다. 그 후 콜레라가 발병해 식수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대신 그 공간에 쓰레기를 매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3년 2차 세계대전 때 방공호가 필요해지면서 쓰레기 위에 다시 흙을 덮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발밑에 대략 6-8미터 가량이 쓰레기였다는 얘기다.

   로마 시대 사람들은 수로가 흙벽에 오염되는 것을 우려해 시멘트, 석회 등의 재료와 에센셜 오일들을 활용해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지나다니기 안전한 높이를 붉은 줄로 표시해 놓았는데 그 줄이 옅게 보였다.

   이탈리아인들은 연합군이 성당은 폭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성당 아래에 환풍구를 뚫어 놓았는데, 미군이 성당에 투하했던 불발탄이 그 환풍구 아래로 전시되어 있었다.

로마 시대에 지어진 나폴리탄 가옥도 방문했다. 다른 고대 도시들이 오래된 건물들을 중심으로 밖으로 확장한 것과 다르게 나폴리는 본 건물 위에 신식 양식으로 건물을 쌓아올렸다고 한다. 일종의 ‘건축적 지층’ 이라 할 만하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층 간의 괴리감은 없었다. 무지개떡 먹고 싶다.

 

   모든 고대 로마 시대 도시들은 중앙에 극장이 있었다. 따라서 나폴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극장 위에 그대로 벽을 덧대고 건물을 지어 그 모습을 확인하긴 어렵다고 한다. 처음 이 사실이 밝혀졌을 당시에 이 집에 살던 할머니에게 돈을 지불하고 집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조사 중 지하에 할머니가 몰래 운영하던 와인 창고를 찾아냈단다. 그런데 이 창고에 로마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곳을 시작점으로 차차 극장의 진위를 밝혀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거주자들이 집의 가치를 알고 위약금을 터무니없이 높게 불러 발굴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역시 도시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보존하기로 했단다. 정말 영화같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영화 같다는 표현은 영화가 허구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 아닐까?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나, 사실 그 자체를 찍은 영화는 영화가 아닌가? 사실을 각색한 영화는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각색은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인가? 각색 없이 영화를 드라마틱하게 찍을 수 없을까? 드라마틱한 것은 줄거리를 놓고 말하는 것인가, 충격을 주는 요소의 존재 여부를 놓고 말하는 것인가? 감정 이입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혼자 보는 것과 몇백 명이 같은 공간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화면의 크기나 소리 같은 물리적인 요소, 그리고 같이 웃고 울고 놀란다는 심리적인 요소 둘 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 1월 10일.

로마에 대한 생각들.

   바티칸은 로마 카톨릭의 정점이다. 그 중에서도 성 베드로 대성전은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교황- 교회의 황제. 평신도에겐 아득히 먼 존재처럼 느껴진다. 카톨릭이 제시하는 스토리텔링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신약을 재해석한 방식을 작가가 표현한 고유의 구도, 표정, 움직임, 역동성 등으로 지레짐작 할 수 있다. 

 

   가령 수태고지는 한 테마로 자리매김했다. 여러, 사실상 르네상스롤 향유한 모든 작가들이 한 번씩은 거쳐간 퀘스트 같이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로 스토리텔링 / 해석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다. 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는 조금 더 개방적인 듯하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과 비슷한 행동들을 한다. 그 인간성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에서 아폴론의 표정, <다비드>의 표정 등은 카톨릭 성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미칼렌젤로의 피에타에서 성모 마리아가 그런 역동적이고 진실된 표정을 하고 있었더라면?

 

   더 인간적이고 친숙해 보이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카톨릭의 의도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조금 멀고,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올려보아야 하는 고귀한 존재여야 한다. 일반적인 인간과는 달라야 한다. 절대자.

 

   그런 면에서 카톨릭은 삼위일체라는 절대적인 근거를 내세우고, 교황은 교회의 황제이지만 그마저도 신의 대변’인’에 불과하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패배하기도 한다! 어렴풋이 아테네?가 아라크네? 와의 베틀 배틀에서 진 것 같기도.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난 로마- 이탈리아- 의 예술품들을 보며 종교와 관련된 작품에는 경외심을 넘은 두려움을, 신화와 관련된 작품에서는 인간성을- 친숙함을- 먼저 느꼈다.

 

   물론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가 1차원적인 무표정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 예수- 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품고 있는 그 구도는 천재적인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소외시키지 않고 더 고결한 존재로 묘사했다. 카톨릭과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마리아의 신성화에 있는 것처럼.

   그런데 피에타에서는 종교, 우월함, 경외, 이런 것보다 모성애가 먼저 보였다. 신의 어머니니, 원죄니 뭐니 다 집어치우고, 어머니가 아들을 품고 있다. 표정은 편안해 보이기도, 무표정해 보이기도 한다. 예수가 부활할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자는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 넓은 치마폭에 인간의 모습을 한 신 예수 그리스도는 힘없이 늘어져 있다.

 

   미켈란젤로의 의도야 나야 알지 못하지만, 성스러운 영역인 종교와 관련된 작품에 인간성을 부여하려 한 것 아닐까- (르네상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티나 대성당은 그 인간성을 건드리면서도 카톨릭의 주제 자체를 관통하고 있다. 천장을 뒤덮은 인간의 본질과 종교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해석이 보일랑 말랑.

 

   천장화를 완성하는 건 <최후의 심판> 임이 분명하다. 천지창조를 통해 만들어진 인간은 원죄를 저지른다.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가 인간을 통해 세상에 등장한다. 

(갑자기 든 생각이다. 예수는 사춘기를 보냈을까? 음식을 어릴 때 가려 먹었을까? 알레르기는? 사실 이런 거 다 신성모독일 거다, 아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고해성사 한 거 다 무색해졌다.)

 

   어쩄든. 천지창조의 아담의 모습을 최후의 심판 속의 예수가 하고 있다. 본질은 인간과 신은 뗴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범 인간” 을 육체적으로 보여준 예수를 따라간다. 믿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 ‘복’은 ‘구원’ 보다 훨씬 약한 것 같은데.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한다. 인간은 하염없이 그 사상을 공부하고, 미켈란젤로는 예수에 인간성을 부여한다.

산토리니 가는 비행기.

1월 12일.

   어째 글은 비행기에서 쓰게 된다. 숙소에서는 귀찮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한다. 웃긴 건 공항 갈 때 훨씬 더 일찍 일어난다. 몇 번을 타던 간에 공항의 분위기는 늘 신기하다. 국가 입장에서는 여행객이 처음 도착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1급 보안시설이니.

 

   그리스에서는 정말 신화 속의 신 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미국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충격적으로 낮은 물가, 지나치게 짜고 기름진 음식과 찬 맥주. 다 먹고 알딸딸하게 집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길고양이들. 복원을 다 하다 만 듯한 건축물들. 낙천적? 착해 보이는 사람들. 착하기보다 가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야겠다.

 

   그런 게 건축물에서도 보인다. 내가 판테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건축물의 모든 부분에 생각을 했다는 게 읽히기 때문이다. 원기둥, 구체 등의 기하학적인 요소들이 들어맞는 것부터 천장의 오큘러스, 바닥의 수로, 무게를 줄이기 위한 혁신까지. 머리 쥐어뜯으며 설계했을 모습이 보인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런 정확성이나 칼같이 잰 날렵함은 없었지만, 그 다양한 건축물들의 잔재..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아테네라는 도시가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이 보였다. 헤롯 극장, 에릭테이온, 신전 모두 사람을 위한 건축물인 것 같이 느껴졌다. 부서진 대리석이 잔디밭에서 뒹구는 모습은 좀 처량하기도 하지만, 자연스럽다. 인간이 자연에서 캐고 직선적으로 다듬은 돌은 인간에 의해 부서져 다시 자연으로 회귀한다.

 

   로마인들이 판테온에 들어서면 건축물과 신의 존엄성에 경외심을 느끼고 경건해졌을 것이다. 그에 비해 그리스인들은 웃으며, 빵 한 조각 뜯으며 아크로폴리스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판테온과 본질은 동일하지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판테온이 신들의 존엄성을 부각해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면, 아크로폴리스는 신과 인간을 더 가깝게 하려 했던 것 같다. 그건 고딕 양식과는 또 다르다. 물론 고딕 시대에서 한없이 건물을 높게 지으려 했지만 고딕 건물들을 보면 아크로폴리스 / 신전같은 그 푸근함이 없다. 들어가면 입이 떡 벌어진다. 바벨탑이나 고딕 성당이나 카톨릭은 높게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네. 뭐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카톨릭이 추구하는 가치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는 많이 다르니까. 그리고 그렇게 규제 많이 걸고 해야 사람들이 그거 벗어나려고 창의성을 발휘한다.

 

   창문을 내다보니 섬들이 흩뿌려져 있다. 구름이 땅에 그림자를 얹어 놨다. 프로펠러 시끄럽다. 이런 비행기 처음 탄다. 비행기 구색만 갖춘 것 같다. 새 부딪히면 끝장난다. 23키로짜리 캐리어 싣고 가기도 조금 미안하다.

 

   바다가 처음 보는 파란색이다. 온통 짙었다가 땅 쪽으로 가면 투명해지고 물에 숨겨진 육지의 끄트머리가 드러난다. 땅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은 얇은 마카로 그은 것처럼 그 가장자리만 진하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유명한 파란 지붕의 집들은 그리스 정교회 교회들이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나 신을 모시는 곳이 관광지화 된 게 아이러니하다. 물론 성 베드로 성전이나 피렌체 두오모 같은 곳들은 예외. 판테온 같은 곳들. 400년 후에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한국판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으로 웬 칠레 관광객 투어코스에 포함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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