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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H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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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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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었다. 늦은 아침에 머리를 비적거리고 일어나니 약속 시간까지 두 시간 쯤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약속을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준비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할 말이라는 건 자원과도 같다. 그 대화의 소재, 그러니까 자원이 고갈되면 할 것이 없어져 버린다. 그럼 간편하게 시간을 때울 소재를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간편하게 시간을 때울 때는 다른 곳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제 3의 중재자를 찾아 나서야 시간을 편하게 낭비할 수 있다. 영화나 PC방 따위와 같이, 서로를 쳐다볼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식사 따위로 이어지고, 거기서도 음식에 집중하지 사람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집에 다시 오며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자평할 수 있는 것이다.

 

     공통된 관심사를 공유한다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같은 관심사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갈등과 대립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의 얕은 주장들을 펼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다. 대화하는 상대가 공자나 예수라면 적어도 한 쪽은 의견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지극히 감정 소모적이고 불유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단순히 경조사 때문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그 사람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지위를 평가받는 자리와도 같다. 딱풀로 만든 거미줄 실마냥 간신히 이어오는 그 얇은 사회생활이 한 명이라도 더 축의금을 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키지 않음에도 꾸준히 동창들, 혹은 한 번만 보고 말 인연들을 계속 만나 왔다. 물론 이들을 만날 때 돈이 들고 피곤하지만, 단순히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다음에 만날 때 써먹을 최소한의 정보만 주워담고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나는 최소한으로만 생활해 왔다. 옷차림도 최소한으로 차려입은 듯한, 만나서 하는 것들의 변화도 최소한으로. 본디 투자의 목적이 최소로 최대를 달성하는 것이다. 나는 그 원칙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다른 날과 다름없이 난 씻고 선크림을 대충 휘갈긴 후 문을 열고 나왔다. 후덥지근한 7월의 공기와 눈꺼풀을 반쯤 덮게 만드는 햇빛이 날 먼저 반겼다.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마치 그날의 약속처럼. 

 

     집에서 한참 걸어가야 나오는 버스 정류장에는 광역버스 한 대 밖에 다니지 않는다. 배차간격도 길고 버스를 기다릴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나는 보통 지도 앱을 통해 3분 정도 남았을 때 집에서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12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야속하게도 버스는 방금 전 이 정류장을 지나갔었다. 배차 간격만큼 기다려야 했기에 나는 집으로 되돌아가 기다리는 것과 어떻게든 버텨 보는 것 사이에 갈등했다. 그러나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두려울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 때 더운 공기가 얼굴을 덮치는 그 즐겁지만은 않은 경험은 하루에 한 번으로 족했다. 

 

     정류장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헀다. 학원에 가는 듯한 중학생도, 모임에 가는 듯한 부녀자도, 조끼를 입은 노인도 있었다. 버스는 아직까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정류장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은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눈꺼풀을 반쯤 덮을 만큼 타오르는 태양빛 아래 모두 버스를 처음 타는 영예를 갈망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버스 기사에게 선택될 것인가? 해리포터의 올리밴더 지팡이 가게가 생각났다. ‘승객이 버스를 타는 게 아니라, 버스가 승객을 태우는 것이다.’ 이 엉뚱한 생각에 실웃음이 얄팍하게 입술 사이로 터져나왔다. 

 

     버스에 먼저 타는 영예, 그 특권을 누리려면 싸워야 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한 손에는 태연한 척 휴대폰을 만지고 있고, 한 손으로는 교통카드를 들고 있다. 눈은 좌우로 사방팔방 돌리고, 귀는 버스의 한숨 쉬는 듯한 터덜거리는 엔진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곤두세우고 있다. 

 

     의미가 불분명한 소모임에 나가는 듯한 부녀자가 통화를 끝마칠 즈음에 언덕 너머로 익숙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은 보도블록 끝의 턱으로 향했다. 각자 모이를 찾는 새끼새들마냥 목을 빼고 버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한쪽 발을 빼 보도블럭 턱의 가운데쯤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살짝 들어 버스 기사에게 교통카드를 넌지시 보여주었다. 몸을 앞으로 살짝 굽혀 내 앞에 버스를 세워 달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내 뒤에 서 있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부녀자 한 명이 나를 돌아 앞으로 가려고 하는 인기척을 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누군가 이마에 나이테가 몇 개 더 있고, 볶음머리를 했다고 거기에 사회적 특권의식을 부여하면 안 된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양 물불 안 가리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사나운 모습을 난 가만 지켜볼 수 없었다. 전국 어디서나 보이는 이들의 공통된 이런 무장 방식은 불쾌한 통일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신체적 접촉도 불사하고 일단 하고 보는 사회악이다. 그 어림없는 도전을 막기 위해, 이 볶음머리 군단의 일원이 침투해오는 것을 막기 난 왼팔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고 팔꿈치를 굽혀 일종의 삼각 모양을 만들었다. 이건 삼각 지대다! 장판파 장비의 심정으로 난 팔꿈치를 더 구부려 목도리도마뱀처럼  팔의 각도를 벌렸다. 그러니 이 부녀자는 주춤하며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다. 다시금 난 최소한의 신체 동작으로 최대한을 이끌어냈고, 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버스 기사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으나, 버스가 점차 오른쪽으로 그 기세를 몰아 들어오며 속력을 내 앞에서 급격히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버스는 속도를 줄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빠르게 내 쪽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들었던 생각은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뿐이었다. 그래서 아직 영글지도 않은 머리를 굴리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의 효울을 이끌어낼 방법을 생각했다.

 

     ‘버스의 승차하는 문은 안쪽으로 접히며 열린다. 그 문이 접히는 방향은 오른쪽이다. 따라서 문의 오른쪽에 서 있어봐야 옆의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밖에 되주지 않는다. 최대한 문의 왼쪽에 서 있으면 그 문이 접힘과 동시에 버스 안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그 짧은 몇 초 내에 이런 발상을 한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며 난 문의 왼쪽으로 몸을 슬그머니 기울여 비스듬히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 버스 안으로 튀어들어갈 궁리를 했다. 아니나다를까 버스의 문은 오른쪽으로 접히며 열렸고, 문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난 버스 안으로 몸을 던졌다. 버스 기사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 조용한 전쟁의 승자를 반겼다. 그리고 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정말 예기치도 못한 일이었다. 익숙한 ‘학생입니다’ 대신 ‘잔액이 부족합니다’ 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편의점에서 충전한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니! 그 때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 집에 들어가기 전 소시지와 반숙 달걀을 사지 않았던가. 부피 대비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었으나, 그만큼 맛이 보장되어 기회비용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두 가지 품목이었다. 소시지 안에 듬성듬성 박혀 있는 치즈 덩어리를 빨아먹고 큰 덩어리가 나올 때마다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던 기억이 났다. 반숙 달걀의 촉촉함은 먹먹하니 뭉거져 있는 밤 공기를 잊게 해주기 충분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다줄지는 나는 예상치도 못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옆으로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내 뒤의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바로 뒤에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팔을 뻗었다. 혼란에 빠진 채로 난 몸을 비킬 수밖에 없었다. 그건 최악의 실수였다. 살수대첩처럼 막고 있는 존재가 없어지니 승객들이 물밀듯이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리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허둥지둥 지갑을 펼쳐 지폐를 찾았다. 그러나 지폐는 파랗지 않았다. 누렇게 해진 5000원권 한 장만이 나에게 빙긋 웃고 있었다. 지폐를 꺼내들자 기사는 날 힐끔 바라보더니 잔돈이 없다는 말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5000원이라도 내고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그럼 나의 투자의 원칙에 위배되는 중죄였다. 

 

     짜증나기도 전에 혼란스러웠다. 버스 기사의 눈썹이 조금씩 올라가더니 이내 눈초리는 한심에 찬 노여움으로 바뀌는 듯했다. 생각은 완벽했으나 현실은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마지막 손님이 다 타고 나만 홀로 버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그 눈빛들은 태양보다 더 뜨거운 듯했다. 버스 기사는 한숨을 쉬더니 다음에 두 배로 내라는 말을 하며 그냥 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공짜로 타는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  말을 하며 버스 기사도 다음에 두 배로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안쓰러우니 한 번 공짜로 태워 주겠다는 그 가엾음이 느껴졌고 그것이 날 가만두지 않았다. 나는 앞문을 통해 얼른 그 버스에서 뛰쳐나왔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듯해 뛰지는 않고, 빨리 걸었다. 간판들도, 가로수들도, 그 밑의 잡초들도, 구름들도 모두 날 쳐다보는 듯했다. 빨리 걸었지만, 쭈욱 뻗은 남부순환로가 그날따라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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